‘가습기 장관’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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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장관’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

최예용 0 3967

[조호연 칼럼]‘가습기 장관’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

 

경향신문 2016 5 30 

 

서상목, 박윤흔, 김철수, 강현욱, 임창열, 변재진, 김성이, 전재희, 진수희, 임채민, 진영, 문형표, 유영숙. 맞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책임이 있는 장관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한 만큼 세상은 달라진다. 최소한 “인간의 예지능력에 한계가 있고 가습기 사건도 그런 범주의 문제”(윤성규 환경부 장관)라는 궤변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윤 장관은 “국민 세금으로 가습기 사건 피해자를 돕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세금을 대형 참사 피해자 구제 말고 어떤 곳에 써야 맞단 말인가. 사실 그가 세금 얘기를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장남에게 돈을 증여한 것을 장관후보자 내정사실을 안 뒤에야 신고해 탈루 의혹을 샀기 때문이다.

               

               

1994년 재앙의 씨가 뿌려진 ‘가습기 참사’를 막을 기회는 많았다. 그해 SK케미칼 전신인 유공이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했을 때가 첫번째 기회였다. 당국이 의문을 품었다면 살균제는 세상에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시 관련 부서 장관은 보건복지부 서상목, 환경부 박윤흔, 상공자원부 김철수다. 환경부가 살균제 원료물질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에 대해 ‘유독물에 해당 안됨’이라고 고시한 1997년에는 더 결정적인 기회가 있었다.

환경부가 유공의 신고대로 카페트 용도로만 쓰도록 제한했다면 이 독성물질은 가습기에 쓸 수 없었다. 질병관리본부는 2014년 백서에서 “PHMG는 널리 알려진 독성물질로 정부가 파악했어야 했다”고 했다. 버스 지나간 뒤 손 흔들기다. 통상산업부는 살균제를 업체가 알아서 안전성을 확인하는 제품으로 분류했다. 업체가 알아서 안전성을 확인하라니, 무책임의 극치다. 당시 환경부 장관은 강현욱·김명자, 통상산업부 장관은 임창열이다. 모든 장관들의 혐의를 일일이 지적하기에는 지면이 좁다. 

 

2011년 8월 가습기 살균제의 살인독성이 드러난 이후에도 정부의 헛발질은 계속된다. 살균제와 폐손상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한동안 해당 제품을 수거하지 않았다. 시민이 죽어나가는데도 기업의 피해를 더 염려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국민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정부는 집단 폐손상 현상을 두고 괴질 타령을 했지만 정작 괴질을 앓고 있었던 것은 정부였다. 여기서 새삼 ‘가습기 기업’들의 악마적 소행을 고발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이름이 거론된 장관들이 억울해할지 모르겠다. 나만 잘못했느냐, 산하기관 잘못까지 뒤집어써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장관직은 국민 생명과 안전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우리는 그들이 가습기 사건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다. 대형 사건이 발생하면 발뺌하기 바쁘고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드러나면 타 부서나 기업에 책임 떠넘기기로 들어간다. 대국민 서비스가 아니라 책임회피 심리가 내면화돼 있다. 이런 정부가 국민과 생명을 존중할 리 없다. 가습기 참사를 교통사고와 동일시하는 발상이 공연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장관은 장관 자격이 없다. 

 

가습기 참사 피해자들과 가족의 삶은 너무 처연하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잃은 딸의 기일에 케이크를 사들고 찾아가는 부모의 심정을 누가 알 것인가. 숨 쉬기도 어려운 고통에 몸부림치던 어린 딸이 숨진 것은 하필 생일이었다. 10년 넘게 산소통 메고 살아가는 10대 소년의 힘겨운 삶은 또 어떤가. 세살 어린 딸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엄마 아죠아죠(안아줘)”란 말이 귀에 쟁쟁해 다른 자녀를 안지 못하는 엄마의 가슴은 찢어진다. 가족이 ‘아픈’ 오빠만 챙기는 게 서러워 심부름할 때마다 “나 이거 하면 예뻐해 줄 거야?”라고 묻는 어린 딸을 바라보는 심정도 애달프다.

1억원의 폐이식비에 매달 300만원 넘는 약값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의 삶은 바라보는 것조차 괴롭다. 갈수록 가족간 유대가 엷어지고 삶은 피폐해진다. 피해자 가족은 ‘내 손으로 가족을 해쳤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누가 죄 없는 이들을 벼랑으로 내몰았나. 

 

장관의 소명과 사명감은 한국에서 길을 잃었다. 부동산 투기 등 도덕적 결함이 있는 무자격자들이 임명되면서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충성하고, 대통령이 지시한 대로 받아 적는 영혼 없는 직책으로 전락했다. 국정의 최고 실무책임자가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나 개인 경력 관리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해도 할 말이 없을 터이다.

땅바닥으로 추락한 장관의 본령을 회복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바로 장관과 그들이 한 일을 지켜보고 기억하는 것이다. 장관 지망생이나 장관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강력한 메시지도 될 것이다. 당장은 가습기 참사 피해자 가족과 아픔을 나누고 연대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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