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전문가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진짜 가짜 구분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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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전문가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진짜 가짜 구분 잘못"

관리자 0 3796
2019-05-31 오마이뉴스
"진짜와 가짜라고 말하지 마세요."

지난 5월 30일 오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아래 사참위) 가습기살균제 피해 인정 문제 포럼 도중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발표 도중, 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 일어나 '가짜 피해자와 진짜 피해자'라는 박 교수의 표현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당시 박 교수 발언은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구제급여'와 '구제계정'으로 구분하는 게 잘못됐다는 취지였지만, 당사자에게 가짜와 진짜라는 표현 자체가 큰 상처를 준 것이다. 박 교수가 발언 취지를 거듭 설명했지만, 이 피해자는 "진짜, 가짜가 빗대서 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화내는 건 피해자가 (그런 표현에) 트라우마와 울분이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진짜/가짜 나누기는 어떻게 생겨났나

 

1403명 대 236명. 가습기살균제 피해신고자 중 사망자 수와 정부 구제급여 대상자로 인정된 사망자 수다. 5월 3일 현재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자 6389명 가운데 구제급여 대상자는 810명에 불과하고, 구제계정 대상자 2127명을 포함해도 절반에도 못 미친다.

 

1403번째 가습기 살균제 희생자인 고 조덕진 목사의 죽음을 계기로, 정부의 피해자 구분 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옥시싹싹 뉴 가습기 당번'을 수년간 썼던 조 목사는 지난 2016년 말 폐섬유화 진단을 받고 정부에 피해신고를 했지만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 가능성 거의 없음(4단계)'이란 판정을 받아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고 결국 지난 4월 25일 폐렴으로 숨졌다.

[고 조덕진씨 사망 관련기사]
어머니에 이어 아들도... 옥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사망 http://omn.kr/1ixly
아버지 장례 치른 딸, 영정 들고 청와대 간 까닭 http://omn.kr/1iz2g
1403번째 죽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청와대 앞 눈물의 삭발 http://omn.kr/1j77a

지난 2011년 8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처음 세상에 드러난 뒤 당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폐질환, 천식, 태아피해 등 일부 질환에 국한하고 이마저도 1~4단계로 구분했다. 1단계(가능성 거의 확실)와 2단계(가능성 높음) 피해자만 정부 구제급여 대상자로 지원하고, 3단계(가능성 낮음)와 4단계(가능성 거의 없음) 피해자는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아래 특별법)을 시행하면서 가해 기업 분담금과 정부 출연금으로 특별구제계정을 추가해, 구제급여를 받지 못하는 피해자들도 치료비 등을 보상받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정작 가해 기업에선 구제계정 대상자는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 등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른바 '진정한 피해자'나 '가짜 피해자' 같은 이분법도 여기서 나왔다.

 

"폐 손상 일으키는데 폐렴과는 무관? 피해구제위원회 비이성적"

30일 오후 서울 명동 포스트타워 10층 대회의실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인정, 무엇인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사회적 참사 피해지원 포럼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 피해자 인정 문제를 놓고 첫 단추를 잘못 꿰었기 때문이라고 자성하는 목소리를 냈다.

박태현 교수는 이날 "의학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 피해구제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노출 피해 인정에서 '발병 기전'과 '임상적 특이성'을 확인하길 원했다"면서 "피해구제에서 노출되는 노출과 질환의 인과관계란 '의학적 확실성'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발생한 손해를 누구에게 책임지울 것인지를 가리기 위한 법적 가치 결정이라는 점을 위원회는 알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고 조덕진 목사 죽음으로 특별법을 다시 보게 됐다는 박 교수는 "정부가 기업 분담금으로 구제계정을 만들었지만, 구제계정 대상자는 구제급여와 달리 '건강피해인정증명서'도 발급받지 못하는 등 진정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면서 "피해자 안에서 구제급여와 구제계정 구분을 없애고 정부출연금과 기업분담금을 통합한 피해구제기금을 만들어 같은 병증의 피해자에게 차별 없이 지원하자"고 제안했다.

김재용 한양대 건강과사회연구소 교수도 "'가습기 살균제 폐 손상'은 일부 전문가가 만든 신조어"라면서 "폐를 망가뜨릴 정도로 강력한 독성물질이 '가습기 살균제 폐 손상'을 일으킨다는 건 인정하면서도 폐렴을 일으키는 건 인정할 수 없다는 비이성적인 논리가 남아있다"고 의학계 중심의 피해자 판정 문제를 꼬집었다.

김 교수는 "환경부도 재정 고갈 우려 때문에 원활한 (피해자 지원기금) 집행이 안 이뤄져 법적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구제계정 확대에만 초점을 맞췄다"면서 "공공부문이 시의적절하게 피해자 지원하고 집단소송에 필요한 행정적 지원 등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피해자들 원성을 덜 들었을 것"이라고 말해 참석자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아울러 김 교수는 "피해자와 가족들은 스스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그로 인해 아팠다는 것도 증명해야 했다"면서 "그러나 앞서 왜곡된 프레임에 따라 '경제적 보상'을 바라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선입견이 피해자의 정당한 배상 요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조순미씨는 "과거 급박했던 시기에 편협한 인정 질환과 (피해) 단계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기관과 의학자,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들은 모든 피해자들에게 양심선언하고 사과해 달라"면서 "이것이 첫 번째 치료의 길이며 화합의 방법"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도 자성 목소리 "피해자 구분하는 발상부터 잘못"  

전문가들 사이에 자성 목소리도 나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면담해온 박소영 강북삼성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이날 "이 문제(피해 판정)에 많이 관여했던 전문가로서 반성하고 사죄한다"면서 "전문가로서 팩트만 얘기하면 된다는 자세도 부족했구나, 반성하게 된다"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박소영 교수도 "가습기 살균제 폐질환은 '특이질환'이 아닌데도 우리(의학계)는 마치 희귀 신종 질환을 발견한 것처럼 얘기했다"면서 "나머지는 '비특이질환'이어서 구분해야 하고 피해자를 가르고 골라내야 한다는 발상부터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019-05-31 오마이뉴스 

박 교수는 "지금처럼 가해자가 명확할 때는 피해를 입증하고 반증하는 문제는 피해자 책임이 아니다"라면서 "정부가 왜 그 가운데서 기업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지, 정부가 모든 피해자를 판정하는 건 지금에 와서는 불가능하다"라고 따졌다. 박 교수는 "(피해자를) 구분하고 판단할 수 없으면, 과학적 기준으로 인정할 수 없으면 정부가 책임지고 안고 가는 것이고 그에 대한 부정은 기업이 하는 것"이라면서 "정부가 기준을 더 하나 만들어 해결하려는 프레임을 바꿔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해 참석자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박태현 교수도 "그 전에는 나도 기존 지식과 경험, 대법원 판례 법리에 메여 있었고 그 사고 한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고 조덕진 목사 사망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처음 겪는 전혀 새로운 사태라는 걸 인정했다"면서 "새로운 사태에 대해 새로운 틀과 방식으로 실타래를 푸는 게 아니라 매듭을 끊어야 하는 상황이란 걸 분명하게 인식하게 됐다"고 밝혔다.

임종한 인하대 의대 교수도 "기존 피해 인정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꿨으면 좋겠다"면서 "지금은 개별 의사가 개별 질환별로 평가하는 방식인데, 구제계정과 구제급여가 통합된다면 의학, 법률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과 피해자 대표로 판정위원회를 구성해 전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청자의 90% 이상이 호흡기 질환이지만 폐 손상은 물론 비염, 결막염, 피부염, 독성간염, 암, 뇌질환 등 다른 장기 질환도 배제할 수 없다"면서 "가습기 살균제 노출 후 발생한 여러 신체부위 피해와 함께 피해자들의 정신적 심리적 피해, 가족 피해, 보상 지연과 사회적 고립에 따른 복합적 피해를 '가습기 살균제 증후군'으로 보고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정부를 대표한 하미나 환경부 환경보건정책관(국장)은 "원인 기업이 형사처벌을 받고 피해자들에게 민사적 배상을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라면서 "그 사이에 피해자들이 어렵고 힘들어 정부가 먼저 보상하고 기업에 구상권 청구 소송을 해야 해 엄격한 인과관계를 따지다보니 피해자들 원성을 샀다"고 밝혔다. 하 국장은 "피해자들은 국가배상을 말하지만 현재는 (법원이)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라면서 "온전한 피해 배상이 될 때까지의 '과정'으로 이해한다"고 정부 역할에 선을 그었다.

이날 포럼을 주최한 황전원 사참위 피해지원소위원장은 "어느 한 가지 접근법만으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큰 사고를 당한 환자에게 내과, 외과 등 각 분야 의사가 필요하듯 가습기 살균제 참사도 행정적, 의료적, 법률적, 사회적 다양한 처방이 모여야 제대로 된 해법 도출이 가능한데,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아직 해결 안 된 것도 정부가 지나치게 행정적, 의학적 해법만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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