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사례 41, 4등급 영아사망] 110일 살다 죽은 딸, 저는 '4등급'아버지입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기록관

[피해사례 41, 4등급 영아사망] 110일 살다 죽은 딸, 저는 '4등급'아버지입니다.

최예용 0 1226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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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원. 
1999년 11월 29일 생. 
2000년 3월 17일 사망. 
생존 기간 110일. 
사망원인은 원인 불명의 폐출혈 또는 급성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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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양산에 있는 여상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는 영광에 있는 영산성지고등학교로 왔다. 영산성지고등학교는 아직 정부 인가를 받지 않아 학교 뒤에 양계장을 만들어 거기서 나오는 달걀을 팔아 운영해가던 가난한 학교였지만, 자퇴와 부적응을 경험한 학교 밖 아이들에게 체험학습 위주의 교육을 해나가던 우리나라 최초의 대안학교였다. 

영광으로 옮겨오기 이틀 전에 아내는 둘째를 출산했다. 그때가 1997년 2월 21일이다.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나는 아이 얼굴만 일별하고는 다음 날 바로 영산성지고등학교로 갔다. 얼굴이 퉁퉁 부은 아내와 갓난아기를 두고 처가가 있는 울산에서 영광까지 가는 길은 참 멀었다. 아내는 그 해 5월에야 아이들을 데리고 영광에 와서 합류했다. 정부 지원이 없던 때라 급료 30만 원을 받고 두 아이를 길러야 하는 곤고한 삶의 시작이기도 했다.

나는 영산성지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매일매일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아이들과 함께 버거운 교육활동을 해나갔다. 내 생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특별한 아이들과 만난 것이다. 그런 와중에 1년 후인 1998년, 영산성지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최초로 정부인가를 받은 6개의 대안교육 특성화학교가 출범했다.

1998년 한 해를 보내고 겨울 방학이 되자, 아내는 셋째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다. 나는 두 아이도 키우기 어려운 가난한 대안학교 교사임을 강조하며 반대했다. 게다가 온통 학교 학생들에게 정성을 쏟아야 하는 처지에 내 자식 교육은 되레 부담이었던 때였다. 그래도 아내는 계속 나를 설득했고, 나 모르게 피임기구인 루프를 제거해 결국 임신이 되게 했다. 인연 소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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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 셋째로 태어난 여원이. 나는 겨우내 여원이와 함께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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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여원이는 그렇게 우리 집 셋째로 태어났다. 1999년 한 해를 오롯이 태중에 있다가 11월 29일에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이내 겨울 방학을 했고, 나는 방학 기간 내내 여원이와 함께했다. 둘째 아이의 아기 시절을 보지 못한 나는 셋째가 세상을 만난 첫 100일을 내 마음에 담기 위해 사택과 학교만을 왔다갔다 하며 방학을 보냈다.

당시 학교 바로 뒤에 있던 사택은 남학생들이 사용하던 기숙사를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다. 스티로폼 패널로 지은 조립식 집이라 많이 건조했다. 더구나 겨울이었다. 겨울에 갓난쟁이가 있는 조립식 집이라 당연히 습도 조절이 중요했다. 그래서 여원이 머리맡에는 겨울 석 달을 지나는 동안 내내 가습기가 돌아갔다.

아내는 텔레비전에서 가습기 살균제 광고를 봤다. 광고는 자주 등장했고, 물을 갈고 청소를 해줘야 하는 가습기에 '인체에 무해하다'는 살균제는 매우 편리하면서 유용해 보였다. 텔레비전 광고를 많이 하고 해로움이 전혀 없다 하는데, 겨우내 가습기를 사용해야 하는 아내로서는 당연히 구매해 아이의 건조한 호흡기를 적셔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트에 가서 손쉽게 구입했다. 옥시 제품이었다. 그리고 1~2일에 한 번꼴로 가습기에 살균제를 넣었다. 전보다 훨씬 안전한 수증기를 아이에게 보낸다는 안도감과 함께.

방학 동안 여원이는 잔기침을 하거나 얼굴이 붉어지며 '캑캑' 소리를 내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건 아기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가벼운 증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되레 당시 6살과 3살이었던 큰 애와 둘째 애가 더 자주 아팠다. 주로 감기와 천식, 비염이었고 폐렴으로 입원한 적도 있었다. 자주 병원 치료를 받는 바람에 병원에 십일조를 한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에 비하면 외려 여원이는 건강했고, 또한 순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두 아이도 피해를 받았지만 이 아이들은 움직이고 활동하는 아이들이다. 밖에 놀러가기도 하고 어린이집에도 다녔기 때문에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가습기 살균제에 덜 노출됐다. 그러나 갓난쟁이 여원이는 밖으로 안고 나가지 않으면 피할 수 없었고, 때는 겨울이라 실내에 주로 머물렀던 터라 꼼짝없이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여원이에게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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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내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다. 첫째와 둘째는 감기와 천식, 비염 증세가 나타났고 급기야 폐렴으로 입원했다. 셋째 여원이는 캑캑 소리를 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갓난아기는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여원이에게 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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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7일은 여원이 백일이었다. 그로부터 6일 후, 개학식과 입학식을 치르며 정신없이 바쁘게 살던 3월 13일 월요일 아침, 아내는 여원이가 평소와 다르게 마른기침을 하고 노인들 해소 끓는 소리를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 데리고 갔다. 엄마의 직감이었을 것이다. 근데 영광종합병원의 소아과 의사는 청진기를 가슴에 대어보더니 별 이상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사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저녁 7시쯤에 여원이는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를 보였다. 아내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여원이가 숨을 못 쉬어요." 나는 놀라서 교무실을 뛰쳐나갔고 사택 앞에서 아이를 안고 동동 구르고 있는 아내를 봤다. 아이는 얼굴이 새파래져 있었고, 눈 주위가 붉었다. '끄윽끅' 숨 쉬려고 안간힘을 쓰는 소리를 냈다. 

영광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여원이를 진료했던 의사는 매우 다급해 하며 '왜 이러지, 왜 이러지' 소리를 반복했다. 강제로 입을 벌리고 산소 호흡기를 달았다. 그리곤 전남대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깜깜한 도로를 달렸다. 

전남대병원 응급실은 환자들로 넘쳐났고, 겨우 병상을 받아 응급 치료를 했다. 폐에서 다량의 피가 나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폐출혈이었다. 여원이는 입원 다음날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엄마 아빠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눈을 감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입원한 지 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애가 왜 이러냐고 병원에 아무리 물어도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건강하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숨을 못 쉬고 죽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대학병원에 왔는데도 100일 지난 아기의 돌연사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망확인서에는 궁색하게 급성 폐렴이라고 사인을 기록했다. 열도 한 번 난 적 없고, 앓아보지도 않았는데 무슨 폐렴이란 말인가. 그리고 폐출혈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100일 동안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폐렴이며, 폐출혈로 호흡을 못하고 의식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죽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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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남대병원에 시신 기증을 제의했다. 시신을 기증하면 아이의 주검을 더 값지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왜 죽었는지 사망 원인을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전남대병원은 거절했다. 왜 거절했는지도 모른다. 아쉬운 것은 혹 그때 시신을 기증받아 폐출혈의 원인을 만에 하나라도 규명할 수 있었다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이 밝혀졌다면, 그 뒤에 잇달았던 수많은 비극들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아내와 나는 아이가 입고 갈 수의를 가지러 집으로 왔다. 자정이 가까웠다. 일주일 간 비어있던 사택은 늪인 듯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의 옷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좋은 옷을 고르고 방울모자도 하나 챙겼다. 나는 아내와 끌어안고 울었다. 비록 짧았지만 방학 내내 눈을 마주하고 알 수 없는 옹아리를 주고받으며 통통한 젖살을 어루만졌던 그 밀도 있는 시간들이 가슴을 채웠다.

다음날 영안실에 있던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모자를 씌운 채 영광 백수면 길룡리 영산성지고등학교 근처 삼밭재 오르는 어딘가에 묻었다. 아이의 시신을 내 무릎 위에 올리고 장지로 갈 때, 무릎 위로 전해지던 서늘한 영안실의 체온을 나는 아직도 고스란히 기억한다. 그렇게 여원이는 우리 곁을 떠났다.

아내는 아이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갑상선 항진증에 걸렸고, 심한 우울감과 무기력으로 자살 충동까지도 겪어야 했다. 나 역시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 너무나 가까워,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아플 때마다 죽음의 두려움을 한동안 느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아픔의 기억들은 점차 옅어졌지만 지금도 여중생들을 보면 '우리 여원이도 살아있었으면 중학교를 다니겠지' 하면서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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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 회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5월 17일 서울 종로구 김앤장법률사무소 앞에서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 방해와 옥시 불법행위 은폐의혹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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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장애를 얻은 것이 알려지면서 여원이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의 호흡기를 안전하게 적셔주기 위해 사용했던 가습기 살균제가 '가습기 살인제'로 사용돼 되레 사랑하는 자식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또 한 번 가슴을 후벼 팠다. 비통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 절통하고 애통한 비극과 절망은 정말 어떻게 다 보상받아야 한단 말인가. 이 세상은 대명천지가 아니라 암흑천지였다.

여원이는 2000년도에 사망했으니 가습기 살균제 사고 시점을 앞으로 많이 당겨 잡을 수 있는 중요 사망자다. 게다가 최연소 사망자인 여원이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라는 사실은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겨울 3개월을 꼬박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것 말고 다른 변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100일을 갓 지난 갓난쟁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피해자 신청을 하였더니 질병관리본부에서 내린 결정은 4등급이었다. 

4등급은 '가능성 거의 없음'이다. 가능성이 거의 없다니! 도대체 무얼 보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인가. 아이가 사망한 병원에서 보내온 자료와 인터뷰 자료에 담긴 그 엄연한 사실이 보이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병리적 현상과 결과를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인가. 겨우내 가습기 살균제를 투여해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비극을 몸소 겪었는데, 멀쩡하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호흡 곤란으로 의식을 잃고 4일 만에 죽었는데, 얼마나 더 객관적이고 확고한 증거자료가 필요하단 말인가. 

등급 판정은 흔히 폐 섬유화로 부르는 '소엽중심성 섬유화를 동반한 폐질환(아래 폐 섬유화)'(2014년 3월, 가습기 살균제 폐 손상 의심 접수사례 조사 결과 보고서 31~32쪽)을 기준으로 삼았다. 폐 섬유화가 명확하면 1등급, 폐 섬유화와 연관이 높으면 2등급, 폐 섬유화와 거리가 멀거나 관련 없으면 3, 4등급이다. 이런 기준으로 그 수많은 피해자 가운데 겨우 361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그 중에 1, 2등급은 168명이고, 3, 4등급은 186명, 판정 불가는 7명이었다. 3, 4등급은 조사 대상 중 51.5%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에 사망자도 27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이런 기준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증상이 오로지, 확고하게,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균일하게 폐 섬유화 '한 가지 증상'으로만 드러난다고 할 때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폐 섬유화만이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 양상의 전부라 할 수 있는가. 우리 몸은 유기적이므로 폐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기에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연령에 따라, 성별에 따라, 건강 상태에 따라, 사용 빈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폐 섬유화든, 폐출혈이든, 폐렴이든 이는 모두 가습기 살균제를 흡입한 사람의 폐 손상인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망가진 폐를 이식한 사람도 3등급을 받아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안은주씨), 사망하고 4등급을 받은 어떤 유가족은 폐 손상 사망자 등급이 원래 4등급이라 여기고 있다가 그 4등급이 '가능성 거의 없음' 등급임을 알고는 가슴에 원한을 쌓아가고 있다(최은총씨). 얼마나 많은 실질적인 피해자들이 어처구니없는 등급 판정으로 또다시 엄청난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른다.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피해 증상을 단 한 가지 증상으로만 한정지을 수 없다. 그것은 다분히 폭력적이고 차별적이다. 이렇게 협소한 판정 기준으로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가해 기업의 면책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이다. 

7월 31일, 옥시가 최종 배상안을 발표한 것처럼 가해 기업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논의되는 상황에서, 더 많은 배상금이 부과되기 전 서둘러 피해자들을 입막음하려는 이런 꼼수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여러 번 죽었으며 또 죽어간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폐와 장기가 망가져 죽고, 사망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는 사실에 애통하여 죽고, 정부 당국자들에게 외면당하고 무시당하여 죽고, 부도덕한 기업의 발뺌과 무책임함에 죽고, 언론의 무관심에 죽고, 의사·교수들로 구성된 판정단에 의해 등급이 매겨져 죽고, 1, 2등급과 3, 4등급을 차별하고 분열시켜서 피해 규모와 배상 책임을 축소하려는 농간에 죽고, 더디고 더딘 우리 사회의 공감 능력에 거듭 죽는다. 이런 사상 최악의 생명 경시 사고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데도 왜 피해자들이 거듭해서 고통을 당하고 거듭해서 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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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이는 4등급짜리 피해자다. 나는 4등급짜리 피해자의 부모다. 그 훌륭한 의학적인 지식으로도 그 아픔을 판정할 수 없단 말인가. 판정한 자는 잔인하다. 그것은 피해자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반영이며 그렇게 손쉬운 판정으로 겪게 될 고통에 대해 무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3등급, 4등급을 매겨 질 낮은 한우 등급처럼 판정해도 지금 현재 겪고 있는 수많은 아픔과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내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다는 비극적 사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 조사를 전면 다시 시행해야 한다. 그리고 등급을 걷어 치워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때에 이뤄진 등급 판정을 백지화하고 다시 원점에서 광범위한 기준으로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피해자들을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기업의 책임을 묻고,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를 촉구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청문회든, 국정조사든, 특별법 제정이든, 단 한 명의 피해자도 남김없이 눈물을 닦아주려는 '공감'의 연대가 없으면 안 될 것이다. 진실로 '공감의 연대'가 없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어디에서 그 소중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글쓴이 정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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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경남의 한 대학학교 교장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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