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TV] 증발된 범인, 11년째 증발되지 않은 피해자
증발된 범인, 11년째 증발되지 않은 피해자 [탐사보도 뉴스프리즘]
2022-04-23 22:00
[오프닝: 이광빈 기자]
시민의 눈높이에서 질문하고, 한국 사회에 화두를 던지며,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가는 <뉴스프리즘> 시작합니다.
이번 주 <뉴스프리즘>이 주목한 이슈, 함께 보시죠.
[영상구성]
[이광빈 기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를 위한 민간조정위원회의 조정안이 최근 어렵사리 나왔습니다.
그러나 옥시레키벤키저와 애경산업이 수용하지 않기로 하면서 11년을 이어온 피해자들의 고통과 막막함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당시 갓난아기였던 승희와 엄마 뱃속에 있던 초희,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박상률 기자가 만나봤습니다.
["평범해지고 싶어요"… 끝나지 않는 고통 / 박상률 기자]
중학교 1학년 승희는 걸음걸이가 조금 불편합니다.
14살의 나이지만 관절은 노인 수준이고, 오래 걷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민승희 / 2살때 가습기살균제 노출> "여기서 학교까지 거리가 별로 안되는데도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가는데 되게 힘들고…엄마가 매일 차 태워주고 있는데 가끔 가습기살균제 시위하러 나갈 때가 있거든요. 그때마다 버스 타는데 버스를 타야지만 학교까지 무사히 갈 수가 있어서 (걸어서는 못 가고?) 걸어서는 못가요."
친구들의 따돌림에 마음은 병들어갔습니다.
<민승희 / 2살때 가습기살균제 노출> "흔히 말해서 왕따라고…제가 많이 체력이 약해서 운동하기도 너무 싫어하고 우울증도 걸리고 그랬으니까"
스티커 꾸미기를 좋아하는 한 살 동생 초희도 오빠와 비슷합니다.
<민초희 / 태아시절 가습기살균제 노출> "다른 애들보다 많이 숨차고, 많이 힘들고…제가 마음이 움츠러들어요. 애들은 알아서 뛰는데 저 혼자만 느리고 뒤쳐지니까 "
아이들은 10여년 전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됐습니다.
<임종한 / 인하대학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승희는, 미토콘드리아는 정상적으로는 막이 굉장히 예뻐요. 근데 이게 망가진 형태, 테두리가 안 보이죠. 이것과 이것과 보면 테두리고 없죠. (승희는) 에너지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없어, 그러니까 뛰려고 해도 힘이 안나는거죠."
승희는 간과 비장도 이미 망가졌습니다.
<임종한 / 인하대학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간이 만성 간염, 간경화가 진행된 것…(14살인데?) 그러니까요 (그런 경우가 흔히 있나요?) 드물죠. 술 마신 것도 아니고 B형, C형 간염에 노출된 적도 없고, 오로지 노출된 부분이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되고 난 다음 이렇게…"
가해자는 기업들이지만 죄책감에 힘들어했던 엄마 경선 씨는 이날을 잊지 못합니다.
<채경선 /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초희) 검사하려고 하는데 무섭고 그러니까 초희가 우니까 승희가 '괜찮아, 안 아픈거야' 이러면서 '나 많이 해봤어'"
각종 약봉지는 서랍 전체를 통째로 채워버렸습니다.
<채경선 /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생리식염수 만드는 소금이에요. 이걸 타서 코 세척하거나 코피가 자주 나거든요. 거의 매일 토하거나 코피가 나거나 이래요, 승희가"
'보상을 받는다 해도 우리 가족의, 그리고 나의 일상이 나아질 수 있을까'. 경선 씨는 지난 11년 동안 너무 지쳐버렸습니다.
<채경선 /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제가 이런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공부 다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싶고 남편도 저렇게 일할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 하던 것 다 때려치우고…"
아이들의 바람을 물었더니 평범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민초희 / 태아시절 가습기살균제 노출>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싶은게 있을까) 평범하게…됐으면"
공룡 같은 대기업들과 싸우며 일상에 지쳐가고 있는 경선 씨의 진짜 두려움은 이 괴로움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광빈 기자]
피해구제 조정안이 거부되면서 피해자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보상금액을 줄여 합의하거나 각자도생으로 소송전을 벌여야 합니다.
긴 시간 동안 고통을 감내해온 피해자들은 옥시와 애경의 조정안 거부에 반발하고 있는데, 대응 수단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시민의 동참을 호소하며 불매운동에 나섰습니다.
한지이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11년 고통 물거품 위기…'조정안 거부'에 불매운동 / 한지이 기자]
작년 10월 출범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 조정위원회는 5개월 간의 협의 끝에 피해자 유족에게 2억원에서 4억원을 지급하고, 최중증 피해자에게 연령에 따라 최대 5억원을 지원하는 내용의 최종 조정안을 내놨습니다.
가해 기업 9곳이 7,000여 명의 피해자들에게 지급해야하는 돈은 최대 9,240억원.
하지만 60%가 넘는 금액을 부담해야 할 옥시와 애경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조정안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옥시와 애경 측은 피해보상 총액과 각 기업이 분담해야 하는 비율, 조정안의 피해보상 기준 등이 부적절하다며 거부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달 말을 끝으로 활동이 끝나는 조정위는 피해자 단체, 기업 대표들과 만나 활동 기한 연장을 논의했지만 옥시와 애경의 불참으로 일단 무산된 상황.
<황정화 / 가습기살균제 피해 조정위원(11일)> "저희에게 주어진 활동 기한, 4월 말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다시 한 번 추가 협의가능성을 열어놓고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활동 연장이 요청된다면 저희가 좀 더 의지를 가지고 협의를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조정위는 옥시, 애경 측과 만나 추가 조정을 시도하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입장입니다.
지난주부터 옥시·애경에 대한 불매운동에 돌입한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는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한편, 조정안이 무산되면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법을 개정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최예용 /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조정위원회가 끝까지 노력을 하고 불매운동으로 기업들을 압박하고 또한 구제법을 개정해서 조정안을 담아서 법으로 강제하는 그런 방법 이런 것들을 모두 다 동원해서 이번에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해결했으면 합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 조정위는 최종 조정안을 기반으로 영국 옥시 본사와 애경산업의 조정안 동의를 이끌어 내겠다는 입장이지만 활동 기한이 불과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 회복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을 전망입니다."
연합뉴스TV 한지이입니다.
[코너 : 이광빈 기자]
2011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태가 불거진 후 정부는 2014년 3월에야 처음으로 공식 피해 판정을 내리고 피해 구제를 시작했습니다.
입법부는 더 늑장을 부렸습니다. 2017년이 돼서야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 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 피해자들에게 요양급여 등을 지급하고 관련 재원 마련 방안을 담은 법입니다.
이후 정부는 2020년 가습기살균제 피해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으로, 특별법 시행령을 개정해 구제를 받을 수 있는 피해자가 늘어나게 됐습니다.
국가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까지 피해자들은 개별적으로 소송 등을 통해 피해를 구제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원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제조업체에 대해서는 배상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난해 10월 피해 구제 민간조정위원회가 출범한 것인데요. 앞선 리포트에서 보신 것처럼 피해조정안에 대해 옥시와 애경이 거부하면서 피해 구제는 다시 막막해졌습니다.
피해자들의 항의에 대해 기업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옥시가 한국 사업 철수를 검토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도 제기됩니다.
옥시는 영국에 모회사를 둔 글로벌 기업입니다. 모회사 래킷벤키저는 코로나 시대에 일반의약품인 스트렙실과 손세정제 데톨 등의 판매 증가로 실적 호조를 보였습니다.
집권 초기 피해 구제 해결을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는 민간 조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권 이양기에 뒷짐만 지고 있습니다.
이런 갑갑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가습기살균제 물질을 연구해온 국내 의학계에서는 희소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의학계에서는 원인 불명인 폐질환 과정을 연구해왔는데요.
박은정 경희대 의대 교수는 옥시의 가습기살균제 물질(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 인산염, PHMG-P)을 활용한 동물실험에서 우리 몸의 일반적 면역체계인 항염증 과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 밝혔습니다.
가습기살균제 물질이 어떻게 폐섬유증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것입니다.
박은정 교수는 "더 이상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애초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불거질 때만해도 가습기 살균제엔 안전인증 표시가 버젓이 달려있었습니다.
정부가 책임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인데요. 지난 11년 간 피해자들이 받는 고통은 변함이 없는 가운데, 정부는 두차례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피해를 유발한 기업은 계속 본질적인 책임을 회피해왔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기간 '공정과 상식'을 바로세우겠다고 했는데요.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들에게 어떻게 적용될지 관심이 모아집니다.
서형석 기자입니다.
[독성실험 생략·부실했던 감독…여전히 공허한 사과만 / 서형석 기자]
심지어 인체에 무해하다는 광고나 문구로 소비자들의 눈과 귀를 속여왔던 기업들,
이런 기업들도 정부 탓을 할 정도로 정부 역시 책임의 화살을 비껴가지는 못합니다.
<박동석 / 옥시레킷벤키저 한국 대표이사 (2019년 8월)> "정부 기관에서 보다 안전한 기준을 만들고 관리, 감독을 철저히 했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이러한 참사가 일어날 수 있었을지…"
실제 살균제 성분이 2011년 의약외품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일반 공산품으로 분류됐습니다.
사람에게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등 기본적인 실험을 하지 않아도 시장에 유통되는데 문제가 없었단 얘기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였던 2017년 8월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들 앞에서 역대 정부를 대표해 사과했습니다.
<문재인 / 대통령 (2017년 8월)> "우리 국민이 더이상 안전 때문에 억울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켜 나가겠습니다."
재발방지책 마련과 함께 지원도 충실히 하겠다 약속했습니다.
같은 해 국회에서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구제급여 마련과 함께 본격적인 피해자 집계가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습니다.
법원은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데다, 기업과 피해자 사이에 만들어진 조정위원회에 피해구제가 맡겨지며 정치권은 일종의 방관자가 된 겁니다. 가까스로 만들어진 조정안이 무산 위기에 처했는데도, 정부는 개입하기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정치권 한 켠에선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을 통한 재발 방지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강은미 / 정의당 의원> "다수의 시민들이 이용하는 어떤 물질로 인해서 이렇게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50억원 이하의 벌금 이런 걸로는 감당할 수가 없잖아요."
'중대시민재해'의 적용 범위를 더 넓히고 벌금과 손해배상금 하한선을 도입해 기업의 책임을 더 강화하자는 겁니다.
다만 이 역시 소급적용은 난망합니다.
문 대통령의 사과 이후 지난 5년은 피해자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희망고문이었을지 모릅니다.
이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눈과 귀는 '안전한 대한민국'을 약속한 윤석열 당선인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연합뉴스TV 서형석입니다.
[클로징: 이광빈 기자]
한 번쯤 이런 경험 있을 겁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자기 전 깨끗한 수건에 물을 적셔 바닥에 펼쳐두는 모습을... 혹시라도 건조해 내 자식이 감기에 걸릴까봐...
아마 피해자들도 그런 마음으로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을겁니다.
이 제품을 판매한 기업들은 부모의 심정으로 피해자 입장에 서 보는 건 어떨까요?
이 사건을 다룬 '공기 살인'이라는 영화 속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증발된 범인, 피해자는 증발되지 않았다' 아직도 피해자들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겁니다.
하루빨리 추가 협의가 이뤄져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합니다.
뉴스프리즘 오늘은 여기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