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가해기업들 ‘평온한 일상 찾고 싶다’ 최후변론…우리 아이들은 죄없이 폐질환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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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가해기업들 ‘평온한 일상 찾고 싶다’ 최후변론…우리 아이들은 죄없이 폐질환 종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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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기업들 ‘평온한 일상 찾고 싶다’ 최후변론…우리 아이들은 죄없이 폐질환 종신형”

경향 2024.1.9 

가습기살균제 형사재판 모두 방청한 피해자 A씨
가습기메이트 사용 후 딸과 아들까지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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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자 A씨가 병원에서 면역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 A씨 제공.

“지난해 10월 공판 최후변론에서 가해기업 관계자들이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말했어요. 그동안 재판받는 과정이 자신들한테 ‘너무 가혹했다’면서 ‘이제는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 싶다’고요. 그 말을 듣고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탓에 종신형을 받은 듯 평생 폐질환을 겪어야 할 우리 딸과 아들이 생각났어요.”

A씨는 애경 가습기메이트를 사용한 뒤 자신뿐 아니라 딸과 아들까지 천식과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그에게 ‘평온한 일상’은 이제 꿈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가해기업의 관계자들은 이제 ‘평온한 일상’까지 원한다. 지난 8일 오후 경기 수원의 한 카페에서 만난 A씨는 “나와 아이들은 병원이 일상인 삶을 살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는 A씨가 사용한 CMIT/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 성분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해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된 SK케미칼, 애경 등 기업 관계자들의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앞서 2021년 1월 1심 재판부는 ‘과학적 인과관계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검찰 항소로 진행 중인 2심 재판은 오는 11일 선고를 앞두고 있다. 지난달 31일 기준 총 7891명이 확인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운데 CMIT/MIT 제품 피해자는 2312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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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자 A씨가 형사재판 공판을 방청하면서 재판 내용을 기록해 놓은 노트의 일부. A씨 제공.

A씨는 2008년 9월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뒤 원인 모를 호흡기 증상 등을 겪었다. 2011년 8월 정부의 공식 발표 이후에야 자신과 아이들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임을 알았다. 올해 17세인 딸, 15세인 아들 모두가 건강이 좋지 않은데 정부는 딸과 A씨만 피해구제 대상으로 인정했다.

A씨는 형사재판이 시작된 뒤 1심과 2심이 진행되는 4년여 동안의 공판을 빠지지 않고 방청하면서 기록했다. 공판은 오전 10시쯤 시작해 밤늦게까지 이어지기 일쑤지만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속죄’하기 위해서다. A씨는 자신이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는 바람에 아이들이 현재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평생 고통을 받게 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공판에 개근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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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자·유가족들과 환경단체 관계자들이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형사재판 항소심 유죄판결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A씨는 “아이들 대신 공판에 가서 자리를 지킨다는 마음으로 공판날이면 시작 1시간 전 도착해 밤늦게까지 재판정에 앉아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와 아이들이 겪고 있는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은 완치가 안 되고, 앞으로 악화하면 폐 이식을 해야 하는데 이식 후 6년 정도 후엔 다시 이식을 받아야 한다”며 “아이들한테 ‘너희는 앞으로 폐를 넣었다, 뺐다 하는 삶을 살 게 될 거야’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구했다”고 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중에는 A씨처럼 과거 가족의 건강을 위해 살균제를 사다가 쓴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이로 인해 큰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A씨는 “딸이 어렸을 때는 (수원)아주대병원이 ‘작은집’이라는 얘기를 할 정도로 매일같이 병원에 갔고, 입원도 1년간 했었다”며 “상태가 안 좋아질 때 10분 이내에 병원으로 가야 하는 골든타임을 맞추기 위해 집도 아주대병원 근처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도 A씨와 자녀들은 면역치료를 받느라 매달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다. ‘평온한 일상’ 발언이 나온 지난해 10월 공판 때도 A씨는 호흡곤란이 와서 급하게 휴대용 호흡기를 사용해야 했다. 그는 “공판 지켜보다 호흡곤란이 온 것만 세 차례”라고 말했다.

A씨는 “재판정에 판사, 검사, 변호인단에다 피고인 가해기업 관계자는 다 들어가 있는데 피해자는 발언할 기회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꾸준히 방청한 이유”라며 “재판부에 ‘피해자인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것을 알리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마지막 공판 최종변론에서도 가해기업 관계자들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A씨는 “피해자들한테 미안하다는 얘기는 없이 ‘유감이다’라고만 얘기하는 걸 보면서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자신들 재직 중에 만든 제품이니까 최소한 미안하다는 얘기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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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자·유가족들과 환경단체 관계자들이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형사재판 항소심 유죄판결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A씨는 2심 선고를 앞두고 아이들과 함께 수기로 탄원서를 작성해 재판부에 보냈다. A씨는 탄원서에 “아이들에게 용서받고 싶다는 내용과 함께 가해기업이 무죄가 되면 그걸 보고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이 어른들이 하는 못된 짓을 배울까 두렵다. 재판부가 본보기를 보여달라”고 적었다. 그는 “딸아이가 ‘재판장님, 저는 꿈이 사라졌습니다, 남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아프니까 못합니다. 친구를 사귀는 등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아파서 못 해봤습니다’라고 쓴 걸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덧붙였다.

2심 판결이 나온 뒤에도 A씨는 공판을 계속 방청할 계획이다. 어떤 판결이 나오든 대법원까지 재판이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A씨는 “2심에서는 가해기업 관계자의 평온한 일상보다는 피해자 수천명의 평온한 일상을 찾아주는 판결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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