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길없음’에 대한 자각과 ‘길’
[세상 읽기] ‘길없음’에 대한 자각과 ‘길’
한겨레신문 2014 11 25
내가 학교를 그만둔 지 3년이 되어간다. 나는 공교육 체제 안에 ‘길’이 없다고 느꼈던 것처럼 체제 바깥에 달리 ‘길’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체제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 속에 체제의 ‘안’을 변혁할 암시가 있으리라고 기대했고, 거기서 배우고 싶었다.
체제는 ‘돈’으로 표상되는 물적 자원과 ‘법’이라는 제도적 틀이 유지한다. 그리고 이들이 구성원들에게 안정감을 부여한다. 학교를 그만둘 무렵, 나는 깊은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공교육에 소용되는 물적 자원은 국민의 세금이었으나 전혀 엉뚱한 곳에 투여되고 있었으며,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일체의 교육적 가능성을 굴복시키는 기제로 작용했다. 제도의 구속력은 강력한 사회적 습속으로 전이되어 우리는 그 너머를 좀처럼 상상할 수 없도록 긴박당했다.
그리고, 학교를 나온 지 3년, 나는 밀양 송전탑 투쟁을 비롯한 많은 현장 투쟁들과 체제 바깥에서 자발적으로 일구어진 수많은 모임들, 실천 공간들과 함께하면서 체제 ‘안’과 분명하게 비교되는 ‘바깥’에 대한 실감을 얻어가고 있다.
그들은 가용할 물적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서로 기대고 있었고, 각자의 진심과 성의가 대낮처럼 드러나는 인간관계를 맺어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달리 강제당할 제도적 규범이 없으므로 자율적일 수밖에 없었고, 많이 다투고, 적지 않게 헤어지지만, 일어나야 할 ‘사고’를 가능한 한 틀어막는 체제 안의 삶보다는 훨씬 정직했다. 따라서 그들의 성공과 실패는 원초적이었다.
그들은 법 제도 바깥에 존재하므로 이 ‘법’이 누구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일상은 그 어떤 안정감도 없었으나, 체제와 갈등하지 않았으면 얻을 수 없었을 해방감과 수많은 우정의 관계들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체제가 구성원에게 부여하는 안정감이 얼마나 앙상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것이 ‘다른 삶’에 대한 무지와 ‘다른 길은 없다’는 강요에 의해 구성된, 밀려남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깔고 앉은 어떤 ‘안락’의 감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나는 한시적인 투쟁의 경험들, 수없이 명멸하는 체제 바깥의 모임과 공간들을 이 장구한 세월을 버텨온 체제 자체와 동렬에 놓고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게 일관된 입장이란 체제 ‘바깥’을 통해 ‘안’을 비추어야 하며, 그랬을 때 우리의 좌표가 밝혀지고, 걸어갈 ‘길’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를 그만둘 무렵에도,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에도 더욱 확고해진 것이 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분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을 표방하고 있으나, 이미 체제 내화된 운동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이를테면 지난 칼럼에서 내가 언급한 혁신학교 운동을 옹호하는 이들은 많은 경우 ‘달리 다른 길이 없으니, 이거라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말 그 길밖에 없는지부터 물어보고 싶다. ‘양날의 칼’인 물적 자원을 부여받고, 정당성을 독점한 폭력일 수밖에 없는 ‘제도’와 부딪치지 않으면서도 체제를 변혁할 길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자율적인 흐름을 넘어서 동원형으로 변해버린 이 운동을 담당할 주체는 어떻게 재생산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체제 변혁을 통한 큰 변화’와 ‘체제 안에서의 작은 변화’ 따위 엉터리 도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 문제와 잇닿아 있지 않으면, 체제와 부딪쳐 스스로 얻어낸 결과가 아니라면, 자율적으로 형성된 주체가 보존될 수 없다면, 기껏 일구어놓은 작은 변화도 무섭게 되돌아가버리거나 끝내 엉뚱한 결과로 귀결되어버리고 마는, 오늘날 우리들 모두를 끔찍하게 긴박하고 있는 ‘체제 안의 길 없음’이라는 우리들 ‘인생의 조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루쉰이 말했듯, 땅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길 없음’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길’이 시작된다.
이계삼 <오늘의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