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소녀와 굶주린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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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소녀와 굶주린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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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소녀와 굶주린 독수리 

가톨릭평화신문, 2021.9.5

흙바닥 위에 쓰러진 소녀가 있다. 소녀의 뒤에는 소녀를 노리는 독수리가 보인다. 아프리카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유명한 사진이다. 사진 기자 케빈 카터는 이 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사진 한 장으로 아프리카 남수단의 비참한 현실이 알려졌고, 대규모 구호 활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세상은 카터를 비난했다. 위기에 처한 어린이를 구하지 않고 어떻게 먼저 셔터를 누를 수 있었느냐는 비난이 쇄도했다. 결국 카터는 수상 두 달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사진을 찍고 바로 소녀를 구조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나 자신이 밉기만 하다. 소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카터가 세상을 떠난 1994년, 한국에서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가습기살균제 판매가 시작됐고, 1000만 개가 넘는 제품이 팔렸다. 2011년 8월 31일이 돼서야 가습기살균제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890만 명이 독성 물질에 노출됐다. 95만 명이 고통을 호소했다. 사망자만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원인은 독성 물질이 아니다. 한국식 기업사회다. 기업의 이윤창출 구조와 논리에 따라 사회는 움직였다. 피해자의 호소에 귀를 닫았고, 살균제의 위협을 못 본 척했다. 경제를 살린다는 당위 아래 실존인 국민은 등한시됐다.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 것도, 기업의 과실로 소비자가 죽는 것도 부수적 피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이다. 소비자의 죽음이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구조적 살해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기업이 경제를 살려도 국민이 불행하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당위다. 한국 사회는 무의미한 당위 충족을 위해 실존을 희생시키는 우를 범했다. 기업뿐 아니라 사회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책임져야 하는 이유다.

2011년 8월 국민은 분노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를 개인이 아닌 구조로 인식하는 시선과 지속적인 감시 없이는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케빈 카터의 마지막 회한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공론화 10주년인 2021년에도 유효하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앞에서, 우리는 관중이 아니다. 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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