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 이대로두면 일 미나마타병 전철 밟는다
2019-08-25 경향 김기범기자
“대통령은 사과했지만 정부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전문가, 시민단체 등이 이 문제를 대하는 현 정부의 태도를 단적으로 비판하는 표현이다. 대통령이 정부 차원의 사과를 내놨지만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과 울분에 갇혀 있어서다.
문 대통령 취임 직후 사과에도
정부, 여전히 선별적·차별적 보상
피해 질환 찔끔찔끔 늘리기만 해
포괄적 구제 등 사회적 해법 필요
국가책임 인정 이뤄져야 ‘원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7년 8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직접 만나 정부 차원의 사과를 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오늘 제가 대통령으로서 정부를 대표해 가슴 깊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과 발언이 나온 지 만 2년이 지났지만 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의 최우선 과제인 피해자들에 대한 포괄적이고 실질적인 보상은 요원한 상태다. 자칫 60년 넘게 매듭을 못 짓고 있는 일본 미나마타병 사건처럼 될 가능성도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피해자들을 1~4단계로 갈라치기해 선별적이고 차별적인 보상만 실시하게 된 근본적 이유로 기업에만 책임을 묻고 국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의 태도를 꼽는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생활화학제품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만한 유독물질이 사용되도록 방치한 책임이 국가에도 있다는 점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정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에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지원 수준은 피해 질환에 따라 구분돼 있다. 폐섬유화, 천식, 태아 피해 등 극히 일부 질환만이 피해 질환으로 인정되는 탓에 아직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질환을 앓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울분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한국환경독성보건학회 추산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건강 피해를 경험한 이들은 약 49만~56만명에 달하고, 중증 피해자만 4만여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지난 23일 기준 정부에 피해를 신고한 이는 6509명에 불과하며, 이들 가운데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835명뿐이다. 특별구제 대상인 2144명을 합해도 신고자 중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만이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 시민단체들은 정부의 피해 인정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협소하다는 비판을 수년 전부터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피해 질환을 찔끔찔끔 늘리고 있을 뿐 근본적으로 피해자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조치는 취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면 1956년 첫 확인 후 60년이 넘게 지나도록 여전히 피해자들의 고통이 이어지고 있는 미나마타병 사건에 대한 일본의 잘못된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60년 매듭 못 지은 일 미나마타병
수십년 재판 끝에 국가책임 인정
의료비·요양수당 등 정치적 해결
갈등 해결 위한 사회적 타결 꾀해
세계 3대 환경사건으로 꼽히는 일본 미나마타병의 경우 발생 이후 국가나 책임 기업은 한국의 가습기살균제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책임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미나마타병이란 일본신질소가 1930년대 미나마타 지역에 세운 아세트알데히드 공장에서 무단으로 방류한 폐수에 포함된 메틸수은에 중독된 물고기, 패류를 먹은 주민들에게서 시야 협착, 감각장애, 언어장애 등 증상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던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미나마타병 배상 문제를 놓고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여러 차례 재판에서 피해자들이 승소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는 미나마타병 사태에 국가 책임이 인정됐다. 미나마타병의 전체 피해자는 20만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일본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피해자는 약 3000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피해자들은 이른바 ‘정치적 해결’을 통한 피해자 범위 확대로 배상금과 요양수당 등을 지급받고 있다. 일본 정부가 미나마타병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 인정 기준을 공식적으로 마련해 3000여명을 피해자로 인정한 것은 피해자가 처음 보고된 1956년으로부터 21년이나 지난 1977년이었다. 또 1차 정치적 해결을 통해 약 1만1000명이 구제된 것은 첫 발병으로부터 39년이 지난 1995년이었다. 이후 2010년에는 약 3만명이 추가로 요양수당과 의료비 등을 지급받는 내용의 2차 정치적 해결이 이뤄졌다. 모두 피해자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끈질기게 시위, 소송, 여론전을 펼친 결과였다. 일본 정부는 미나마타병 발생 초기부터 소송에 지기 전까지 책임이 없다는 자세를 견지해왔다.
미나마타병 사례에서 보듯 지금처럼 정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가습기살균제 문제 역시 일본처럼 지난한 소송 과정을 거쳐야 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피해자들은 육체적, 재정적 고통 외에도 사회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심적 고통을 수십년간 겪게 될 수 있다. 정당한 배상과 납득할 만한 사과를 받지 못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심리적 고통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지난 3월 한국역학회는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피해자 10명 중 7명꼴로 ‘만성적인 울분 상태’를 겪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일반인보다 자살 시도 비율도 4.5배 높게 나타났다.
이처럼 심각한 수준에 이른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실질적 해법으로 전문가들은 ‘사회적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미나마타병 사례에서 일본이 지난한 소송을 통해 얻은 결과물들을 한국 사회에선 공론화를 통해 도출하자는 것이다.
전문가, 시민단체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가습기살균제참사 진상규명과 사회적 해결을 위한 포럼’의 좌장을 맡은 이영희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적 해결에서는 무엇보다도 피해자 구제 방식의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피해자들이 스스로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현행 피해자 구제제도를 이른바 ‘입증 책임의 완화 또는 전환’을 통해 전체 피해자들을 포괄적으로 구제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예용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가해 기업이 분명한 반증을 하지 않는 이상 피해를 광범위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해결의 구체적인 상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과 피해자단체, 학술단체, 정부, 국회, 시민단체, 언론매체 등이 참여하는 정책네트워크를 만들어 정책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국가 책임의 법적 인정이다. 국가 책임의 인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사회적 해결 역시 원활하게 진행되기 어렵다. 반대로 정부가 국가 책임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나설 경우 피해자들을 일괄 구제하는 방안도 가능해진다. 이 교수는 “피해 인정 범위 확대를 위한 노력이 제도 내에서의 점진적 접근이라면, 일괄 구제는 기존 제도를 뛰어넘는 정치적 타결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미나마타병의 경우 소송 빈발로 인한 사회 갈등 심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타결을 꾀한 바 있다”고 소개했다.
이런 방식의 피해자 구제제도 전환이 이뤄지면 일단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것이 확인된 이들은 정부나 기업 측이 반증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모두 구제 대상이 될 수 있다.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지만 정부가 피해를 인정하는 질환이 아니라는 이유로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해 이중고를 겪는 사람들 대부분을 구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접근법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미 국내외의 환경성 질환 피해자 구제에서 적용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구체적 사례로 국내에서는 SK하이닉스 반도체 및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구제에서 일정 기간 노출된 이들에 대해 포괄적인 구제가 이뤄진 바 있다. 해외에서는 일본 미나마타병 피해자 구제(1995년·2010년)가 대표적 사례다.
이 교수는 “국가 책임에 대한 법적 인정 없이 가습기살균제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법을 원활하게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민 안전에 관한 국가의 본원적 책무에 대한 재정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